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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이 정한 CD의 용량

IT조아(it-zowa) 2025. 11. 3. 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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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손끝 하나로 수천만 곡의 음악을 불러온다. 스마트폰 속 스트리밍 세상에서, 한때 책장 한 줄을 가득 채웠던 은색 원반, CD(Compact Disc)는 이제 잊힌 유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작고 반짝이는 원반 안에는 19세기의 예술과 20세기의 기술이 손을 잡은 순간이 숨어 있다.

 기술자와 예술가의 논쟁

1980년대 초, 필립스(Philips)와 소니(Sony)는 아날로그 LP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 새로운 디지털 오디오 매체인 Audio CD를 만들고 있었다. 디스크의 지름과 재생 시간, 즉 “얼마나 담을 수 있는가”가 마지막 과제였다. 필립스는 실용적인 기준을 제시했다.

“11.5cm 크기에 60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소니의 회장이자 클래식 애호가 오가 노리오(Norio Ohga)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전곡이 한 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가 선택한 기준은, 지휘자 푸르트벵글러가 연주한 '합창' 교향곡의 가장 긴 버전으로 재생시간이 약 74분이었다. 예술가의 집념이 엔지니어들의 계산을 이겼고, 결국 CD는 지름 12cm, 재생시간 74분, 용량 약 650MB로 정해졌다. 한 편의 음악이, 기술의 표준을 결정했다. CD는 인류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기술 규격이라 불릴 만하다.

 

베토벤 교향곡 9번 CD-ROM (출처 : Amazone)

CD는 ‘찍는’ 걸까, ‘굽는’ 걸까?  

CD 제작 방식을 둘러싼 이 질문은 둘 다 정답이다. 어떤 CD냐에 따라 만드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CD (Pressing)

공장에서 대량으로 복제되는 음반 CD나 소프트웨어 CD-ROM은 마치 인쇄소에서 책을 찍듯 만들어진다. 원본 데이터가 새겨진 프레스 원판으로 알루미늄 판을 수백만 번 눌러 복제한다. 한 번 데이터가 새겨지면 수정이 불가능한 읽기 전용(Read Only) 기억매체가 된다.

CD 프레싱 - CD 제조 장면 (출처 : SIR ROBIN)

집에서 개인적으로 ‘구워내는’ CD (Burning)

집에서 공 CD를 넣고 ‘버닝(Burning)’ 버튼을 누르던 시절이 있었다. CD-R이나 CD-RW 표면의 염료층이 레이저 열로 미세하게 그을리며 새로운 데이터를 기록했다. 불로 새긴 흔적이 음악이 되고, 사진이 되고, 추억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굽는다’라는 표현을 썼다. 한 장의 디스크가 개인의 기억 저장소가 되었던 시절이다.

CD를 굽는 장면 (출처 : wikipedia)

더 많은 기억을 향한 진화 ― DVD와 블루레이

시간이 흘러,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담고 싶어 했다. 베토벤의 74분은 충분했지만, 영화 두 시간은 담을 수 없었다. 영화를 보려면 중간에 디스크 1번을 빼고 2번을 넣어야 하는 불편함은 저장 매체의 진화를 이끌었다.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탄생한 것이 DVD와 블루레이다.

  • DVD(Digital Versatile Disc)는 CD보다 훨씬 촘촘하게 데이터를 새겨 4.7GB의 용량을 확보했다. 덕분에 영화 한 편이 한 장에 담겼고, 거실엔 DVD 플레이어가 놓였다.
  • 블루레이(Blu-ray)는 붉은 레이저 대신 파장이 짧은 푸른빛 레이저를 사용해 25GB~50GB의 데이터를 저장했다.
    이 짧은 파장 덕분에, 인간은 더 많은 데이터를 더 작은 공간에 새길 수 있었다. 
DVD와 블루레이 디스크 (출처 : pixabay)

CD가 여전히 필요한 곳 ― 기억과 물성의 낭만

스트리밍과 USB 메모리의 시대에 CD는 확실히 주류에서 밀려났다. 노트북에서 CD 드라이브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이제 음악을 온라인으로 듣고 영화를 스트리밍으로 본다. 하지만 CD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저렴한 제작 비용 덕분에 홍보용 광고물이나 도서 부록, 교육용 자료처럼 대량 배포가 필요한 곳에서는 여전히 최고의 가성비를 자랑한다. 미니 CD는 가볍게 나눠줄 수 있는 홍보 매체로, 또 기업이나 아티스트에게는 효과적인 마케팅 도구로 활용된다.

 

동시에 아이돌 팬덤 문화 속에서는 앨범 패키지와 포토북, 굿즈와 함께 팬들에게 ‘소유의 증거’이자 ‘감정의 물건’으로 남아 있다. 음원 파일이 아무리 편리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손끝으로 만질 수 있는 기억의 형태를 원한다.

 

미니 CD의 크기비교와 다양한 미니 CD 사례 (출처 : Wikipedia, DCL Media & Print)

디지털과 낭만의 경계에서

CD는 기술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예술의 결정체였다. 하나의 교향곡이 표준이 되고, 한 장의 플라스틱이 시대의 감성을 담았다.
CD는 단순히 데이터를 담는 도구가 아니라, “음악이 기술을 이긴 순간”, “기억이 물성을 가졌던 시대”의 상징이다.

 

비록 지금은 서랍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지라도, CD는 한때 세상을 지배했던 혁신적인 매체이자, 클래식 음악의 영혼과 반도체 기술의 정수가 만난 아름다운 결과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반짝이는 원반 속에는 여전히 베토벤의 합창이, 그리고 인간의 낭만이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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