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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악 개발의 뒤에 숨겨진 6명의 영웅들

IT조아(it-zowa) 2025. 11. 12.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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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U.S. Army/ARL Technical Library)

세계 최초의 전자식 범용 컴퓨터, 에니악(ENIAC, 1946). 그 유명한 흑백 사진 속에는 거대한 기계 옆에 서 있는 여성들의 모습이 늘 함께 등장한다. 그들은 누구였을까? 단순히 비서이거나, 홍보를 위한 모델이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여성들은 실제로 기계를 조작하며 코드를 연결했던, 에니악 개발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인물들이다. 하드웨어를 설계한 애커트와 모클리의 이름은 신문마다 대서특필되었지만, 시연 프로그램을 만든 여섯 명의 여성 프로그래머들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의 공로는 무려 40년 동안 세상에서 지워져 있었다.

 

 

그 긴 침묵을 깨고, 역사의 장막 속에서 그녀들을 불러낸 사람은 컴퓨터 역사 연구자 캐시 클라이먼(Kathy Kleiman)이었다. 그녀는 끈질기게 자료를 추적하고 생존자들을 인터뷰하며 사진 속 이름 없는 여섯 명의 여성에게 다시 이름을 돌려주었다. 그 결과 1996년, 이들은 WITI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비로소 공식적인 인정을 받으며 역사의 자리를 되찾았다.

 

전쟁이 불러낸 여성 수학자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육군은 대규모 탄도 계산을 위해 “여성 수학 전공자 모집”이라는 이례적인 공고를 냈다. 전쟁으로 남성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발된 여섯 명의 여성 케이 맥널티, 프랜 빌라스, 루스 리처먼, 베티 스나이더, 말린 웨스코프, 진 바틱이 바로 에니악의 첫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당시 남성 엔지니어들은 하드웨어 제작에 집중했고, 복잡한 회로를 이해하고 조작하는 프로그래밍은 여성들의 몫이었다. 그들의 일은 전화선처럼 케이블을 꽂고 스위치를 돌리는 단순한 동작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일, 즉 오늘날 프로그래밍의 본질이었다.

사진 윗줄  :  진 바틱, 케이 맥널티, 베티 스나이더 ,  아래줄  :  프란시스 빌라스 ,  말린 웨스코프, 루스 리처먼 ( 사진출처  : U.S. Army/ARL Technical Library)

교재도, 언어도 없이 손으로 짠 프로그래밍

그들은 어떤 교재도, 어떤 프로그래밍 언어도 없이 일했다. 오직 회로도와 배선도만을 손에 쥐고, 머릿속으로 프로그램을 그려가며 새로운 사고방식을 만들어갔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프로그래밍의 개념들을 이들은 배선과 스위치로 직접 구현해 냈다.

 

케이 맥널티프랜 빌라스는 체스트넛 힐 대학의 수학 전공자였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도 ‘준전문직’으로 분류되었지만, 밤낮없이 미분해석기와 탄도표 계산을 담당하며 에니악의 중추 역할을 했다. 루스 리처먼은 신문 공고를 보고 지원한 뒤, 복잡한 궤도 계산을
“재미있는 퍼즐을 푸는 일처럼 즐겼다”라고 회상했다.

 

그들은 케이블과 스위치를 통해 ‘프로그램’이라는 개념을 몸으로 익혔다. 복잡한 계산 과정을 한 번 짜두고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는 루프(loop)의 개념, 계산 안에 또 다른 계산을 단계적으로 실행하는 서브루틴(subroutine)의 개념을 직접 배선으로 구현해 냈다.

 

베티 스나이더는 오류를 추적하던 경험을 살려, 에니악에서 디버깅(debugging)의 개념을 세웠다. 말린 웨스코프는 실험값과 계산식을 세밀하게 대조하며 ‘결과를 검증하는’ 절차를 확립했다 — 이것은 이후 소프트웨어 검증의 시초가 되었다. 진 바틱은 태평양 전선에서 사용할 각도와 화약량, 기상 조건 등 복잡한 변수를 계산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그녀의 직책은 ‘컴퓨터’였는데, 이때의 ‘컴퓨터’란 기계가 아니라 계산하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였다. 

이름 없는 얼굴들에게 다시 이름을

이처럼 교재도 매뉴얼도 없이 오직 회로도와 배선도만을 가지고 프로그래밍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발명한 이 여섯 여성의 활약 덕분에, 에니악은 비로소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가 될 수 있었다. 이들의 작업은 단순한 계산 보조가 아니라, 현대 소프트웨어 공학의 씨앗을 뿌린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컴퓨터 역사의 초석을 다졌다.

  • 진 바틱은 에니악을 저장 프로그램 구조로 개조하고, 이후 최초의 상업용 컴퓨터 UNIVAC 개발에도 참여했다.
  • 베티 스나이더 홀버튼은 정렬·병합 알고리즘을 정립하고, FORTRANCOBOL의 초기 표준화 작업에 기여했다.
  • 케이 맥널티는 탄도 계산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후에 모클리와 결혼해 후속 연구를 이어갔다.
  • 말린 멜처는 시연 프로그램의 정확성을 검증하며 프로그래밍의 신뢰성을 높였다.
  • 프란시스 스펜스는 함수 테이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 루스 타이텔바움은 반복 계산 알고리즘을 만들고, 교육자로서 후배를 길러냈다.

1996년 명예의 전당 헌액 당시 기념 사진 (출처  : ARL Technical Library)

맺음말

에니악 개발의 주역이었던 여섯 명의 여성들은 오랫동안 역사 속에서 이름 없는 얼굴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사실상 그들은 프로그래밍의 씨앗을 뿌린 개척자였다. 그들은 인간의 언어와 기계의 언어를 잇는 다리를 만들었고, 오늘날의 소프트웨어 개발은 그 다리 위에서 시작되었다.

 

이제 우리는 사진 속 이름 없는 얼굴들을 다시 불러내어, 그들의 업적을 소프트웨어 역사 속에 당당히 새겨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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